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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단체들이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를 복원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단체들은 그 무예의 명칭을 십팔기라고 하지 못하고 있다. 십팔기가 전승되고 있었다고 해도 뜻있는 이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무예를 바탕으로 복원을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복원을 내세우며 전통을 내세우는 이들이 가장 기본적인 명칭에서 조차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박금수, 조선의 공식무예의 명칭 '십팔기'에 대한 고찰, 한국체육학회지 46권 제5호, 2007.
위의 논문에서 말하는 대로 '십팔기'란 조선의 공식무예의 명칭이었다. 복원이냐 전승이냐, 서로를 비난하기 전에 기본적인 명칭부터 명확하게 써야할 것이다. 또한 아래의 글에 써있는 전승계보의 진위에 대해서 확인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바, 그 실기로써 승부하는 것이 무인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하는 본문의 일부이다.
십팔기의 전승계보
...... 십팔기가 이 땅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해방과 6.25가 한참 지난 69년, 김광석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로 십팔기도장을 열면서였다. .....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이 어린 시절, 그의 가족들은 전쟁에 광분하던 일제 말기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한동안 지리산 골짜기 문암(門岩: 장흥군 위치면, 화순군 도암면, 나주군 다도면의 경계 지역으로 원래부터 마을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서 정식 지명은 아니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이란 곳으로 들어가 살고 있었다
더불어 그 집안(道家)의 내력으로 인하여 수양에 필요한 여러 가지 공부를 하던 중 양생법과 간단한 무예를 연마하여야 했다. 그 시절에는 그의 집안과 왕래하던 여러 수양하는 지인들이 왜경과 일본군을 피해 그곳으로 숨어 들어왔었다고 한다. 그 사람들 중에는 훗날의 6.25 피난 시절 부산에서 만나게 되는 오공(晤空) 윤명덕(尹明德) 선생도 있었다.
...... 오공 선생의 생존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해범 선생이 16세 때 부산에서 다시 만났을 무렵 환갑을 넘기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1890년 전후에 태어나신 걸로 짐작된다. 당시 오공 선생은 항상 일본군과 왜경을 피해다녔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오공선생은) 낮에는 먹고 살기 위해 뛰어다니고, 늦은 밤과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해범 선생을 데리고 뒷산(천마산)으로 올라가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그때마다 오공 선생은 항상 ‘십팔기’를 말씀하셨지만 당시에는《무예도보통지》란 책도 없었으며, 오직 구전심수(口傳心授)로만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팔기를 비롯한 무예 전반에 대한 이론과 실기, 그리고 수양에 필요한 여러 가지 양생법과 한약학을 반강제로 가르치셨던 것이다.
십팔기 전 종목을 모두 익히지는 못하고 <예도> <본국검> <장창> <장봉> <월도> 등은 이름과 함께 기억하지만, 일부 종목인 <낭선> <죽장창> 등은 무기도 없었을 뿐더러 별도로 익힌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십팔기 이외에도 검법, 창법, 봉술 등 갖가지 기예와 무예이론들을 가르치고 알려주었으나, 당시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기록으로 남길 수도 없었고, 또 어린 마음이라 귀하게 생각지도 않아서 흘려들은 것도 많았다고 한다.
훗날 기억하기로 당시 십팔기를 비롯해 포승줄 감아 던지는 것 등을 보여주셨던 것으로 봐서 당신께서 젊은 시절 잠시 구한말 무관을 지냈거나, 무관을 지낸 분으로부터 기예를 배우지 않았나 짐작된다고 하였다.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외가의 먼 친척뻘이 된다고 해서 어렸을 적에는 ‘외삼촌’이라고 편하게 불렀던 기억 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수년 동안 지금은 대부분 타계한 여러 무예인들과 왕래하며 서로 교유하였다. 마땅히 수련할 만한 장소가 없어 지인들의 태권도장이나 중국무술도장을 빌려 운동을 하던 해범 선생은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십팔기도장을 개원하여 후학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십팔기’란 이름은 오공 선생의 말씀에 따라 붙였는데, 나중에 《무예도보통지》를 구해 보고서야 스승의 가르침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전에 별도로 익히지 않았던 몇가지 장병기예들도 책을 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역 바로 아래에 십팔기도장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무예계의 어느 누구도 ‘십팔기’를 우리 무예로 인정해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예 우리 것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 심지어 중국 무술로 오해하고 무시하기까지 했다. 물론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쿵후(工夫)가 광풍처럼 유행하던 터라 대부분 중국무술이 아니면 배우려 들지를 않았다.
..... 그러다가 70년대 중반, 일부 중국무술도장들과 합기도인들이 함께해서 <대한쿵후협회>를 만드는 것을 보고, 해범 선생은 십팔기의 보존을 걱정하여 사회단체 <대한십팔기협회>를 설립(76년 결성, 81년 등록)하였다. 이때 선생님을 따르던 약 절반의 중국무술도장들도 함께 대한십팔기협회에 가입했었는데, 이로 인해 중국무술도장에서 쿵후를 익힌 사람들에게도 한동안 대한십팔기협회의 단증이 발급되었었다. .....이때문에 예전에 쿵후를 익힌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도 십팔기를 했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역사의 굴곡과 전통의 단절로 인해 야기된 혼란이었다.
이후 약 15년 동안 나름대로 ‘십팔기’를 지키고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세인들의 잘못된 인식과 무관심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던 해범 선생은 1983년 그만 도장 문을 닫고 수양 생활로 접어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십팔기는 몇몇 제자들이 운영하는 도장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5년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심우성(沈雨晟) 선생을 만나면서 해범 선생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심우성 선생은 민속학자로서 오래전부터 우리의 전통 춤을 연구하기 위해 전통 무예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출판업자로 하여금 규장각에 있는 《무예도보통지》를 처음으로 영인케 했었다. 그리고 민속답사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닐 때마다 ‘십팔기’를 하는 사람을 수소문했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1985년에서야 우연히 필자와의 인연으로 해범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십팔기의 전승 계보와 실기를 확인한 그는 해범 선생에게 그 실기를 세상에 공개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도보통지 실기해제》(심우성 해제, 김광석 실기, 1987, 東文選)라는 책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20일, 한국민속극연구소 주최로 서울 동숭동의 ‘바탕골 예술관’에서 출판기념회 겸 최초의 십팔기발표회를 공개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우리나라에 비로소 전통 무예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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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십팔기가 보급되어 오다가 2000년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전통무예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더불어 선생의 저서와 공연을 보고 십팔기를 흉내내는 유사 십팔기 단체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예전에는 십팔기를 중국무술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들조차 십팔기와 《무예도보통지》를 들먹이며 정통성을 주장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분명한 사실은 이 모두가 해범 선생이 일평생 십팔기를 지켜오고 보급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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