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 나온지는 조금 되었습니다만
소식을 전하는게 늦었습니다.
그간 블로그도 너무 오래 방치해두었네요 ㅎㅎ
요즈음엔 박사과정을 진행중입니다.
일년 쉬었다가 수업을 들으려니 어색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여하튼, 석사논문의 제목은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전술 변화와 군사훈련의 전문화" 입니다.
아래는 논문 내용의 요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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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군제는 건국 초 정도전이 《陣法》을 편찬한 이래로 《陣圖之法》(1421), 《癸丑陣說》(1433), 《五衛陣法》(1451)과 같은 일련의 병서를 편찬하여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정비되었다. 이를 통해서 병종, 병력동원, 지휘체계, 무기 등 軍事(military affair) 전반의 체계가 《오위진법》을 기반으로 한 오위체제로 일원화되었다. 오위체제 하의 군인은 뛰어난 신체능력에 기반을 둔 무예 기량을 가진 戰士로 구성되었으며, 그에 따른 훈련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조선 초기 군사훈련의 목적은 통일된 지휘체제의 확립이었다. 이를 위해 講武를 위주로 한 집단훈련이 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강무에서 주된 공격은 기병들의 궁시 사격으로 이루어졌고, 기병의 사격능력은 훈련으로 향상시키기보다는 군사 개개인의 기량에 의존하였다. 세종대 이후 전국적인 군역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의무군역인 정병이 대거 군사로 편입되었다. 때문에 이전과 같은 훈련방식으로는 군대의 기량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비교적 전투능력이 떨어지는 구성원을 대상으로 집단적인 움직임을 통해 전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군사훈련의 형태는 진법을 통한 모의전투형식인 閱武로 변화해 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전기의 전술체계는 기병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러한 전술체계에서는 정예기병의 확보가 가장 중요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이하였고, 조선전기 이후 오위체제로 유지되었던 조선의 군사제도는 임진왜란이라는 유래 없는 대규모의 전쟁을 겪으면서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특히 전투를 수행하는 구성원의 질적인 변화가 크게 일어났는데,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個人火器의 등장이었다. 임진왜란은 전장에 개인화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전쟁이었다. 개인화기의 등장은 살상능력이 더 이상 개인의 신체적인 능력과 관련되지 않고 훈련과 전문기술에 의해서 결정되게 한다는 의의가 있다. 새로운 무기는 군대의 동질화를 초래하였고, 이는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아시아의 전장에서도 개인화기의 등장은 전쟁규모를 확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명이나 일본의 경우 개인화기가 도입되면서 전투 비전문계층이 대거 군인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에 따라 보병의 전술적가치가 증가하고, 전쟁이 대규모화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전쟁양상의 변화를 경험한 조선은 새로운 전술과 이를 뒷받침할 훈련체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하였던 것은 명나라의 병서인 《紀效新書》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기효신서》의 내용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면서 조선은 기존의 오위체제에 따라 체계화되어 있던 전술, 훈련, 편제 등의 軍事 전반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기효신서》에서는 개인기량이 뛰어난 군사보다는 담력이 있고 성실한 일반민들을 군사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각각의 군사를 역할에 맞게 나누어 선별하여 배치하였고, 한 가지 기예를 꾸준히 훈련시켰다. 또한 엄격한 군율과 연좌법을 적용하여 기율을 엄하게 유지하였다. 《기효신서》의 내용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요구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기효신서》의 제도를 의욕적으로 수용하였다. 새로운 전술이 도입되자 이에 맞는 훈련을 수용하였고, 전술과 병학의 이해가 심화되면서 《기효신서》의 내용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훈련의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그 결과 중앙군은 훈련도감, 지방은 속오군으로 명명되고 砲手, 射手, 殺手의 三手兵으로 편성되었다. 단순히 《기효신서》의 훈련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구체화하고 전문화하였다. 이를 통해 군사훈련은 습진이라는 형식으로 수행되었다.
《기효신서》를 통해 정립된 조선의 전술은 북방의 女眞 기병이라는 새로운 적이 등장함에 따라 변화가 필요하였다. 광해군 초기에는 《練兵實記》의 전술을 수용하여 車騎步전술을 적용하여 기병의 양성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기병양성은 조선전기와 같은 기병위주의 전술로 회귀한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대의 보완된 전술은 보병중심으로 고도로 조직화된 상태를 유지하였고, 기병 또한 이전과는 달리 조직화되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11년(1619) 深河전투에서 패배함에 따라 여진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전술 보완이 조선의 향후 과제가 되었다.
임진왜란기 화약무기가 전장에 보급되고 군대의 대규모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전술은 고도로 조직적으로 변화하였다. 조직적인 전술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전문화된 군사훈련이 필요하였으며 그 결과 전문적인 군인에 의한 지속적인 군사훈련이 군사력 건설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에 따라 군대를 조직하고 군사력을 건설하는 일이 과거 다른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개별 병종별로 특화된 훈련이 요구되었고, 개별 훈련이후에 집단훈련을 받아야만 군사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군사훈련을 위한 비용을 국가에서 담당해야 했다. 즉, 군사훈련의 전문화로 인해 군사력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서양의 상비군 형성과는 차이가 있지만, 조선에서 군사 훈련을 국가적으로 관리하게 된 것은 조선적인 상비군 체제가 성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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