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뉴스 중에서..
"태권도 2대2 파격실험, 합동공격-유인공격 눈길"
23일 국기원에서 열린 제2회 한국실업연맹회장기 전국태권도대회에서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각 팀 두 명의 선수가 한꺼번에 매트에 올라 2대2 겨루기를 실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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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태권도가 현 상태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계속해서 발전방향을 모색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기사의 댓글을 보면 대부문의 사람들은 이런 태권도의 모습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실 어떤 무예에서도 일대일이 아닌 다대일이나 다대다의 대련을 공식적으로 경기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레슬링과 같은 격투기에서는 그런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였지만. 역시 격투기와 무예를 사람들은 다른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전에 포스트에서 말했던 것처럼 태권도는 전통무예로서의 전통성이 아직 부족하고, 맨손무예로서도 그 기술체계가 병장기술로 연결되지 않아서 무예성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한국사람들이 태권도를 한국의 국기로써 그만큼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 한다.

여튼 사람들의 이런 비판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좀 내놓고자 한다. 원래 무예란 것이 일대일만을 상정하고 연습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무예라는 것은 전쟁과 함께 발전하였을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병사들을 체계적인 방법으로 빠르게 양성하기 위해서 체계적인 교육방법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이런 요구에 의해서 무예체계가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무예가 전쟁만을 위해서 존재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전쟁과 함께 발전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전쟁에서는 개별적인 역량을 키우기 위한 무예훈련도 중요하지만 전쟁은 일대일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진법을 훈련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런 진법의 훈련은 대치 상황에서 최소한 일대일의 상황에서 싸우는 것처럼 아니면 앞에서 일대일로 대치하면 뒤에서 창과 같은 장병기로써 적을 제압하는 다대일의 상황을 만들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2:2 겨루기를 통하여 태권도의 무예성을 좀더 보완하는 계기가 되진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성대의 무예이야기<18>
식민무예와 주체무예


위에 링크되어 있는 글에 대한 제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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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는
무예뿐만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 주체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특히 장기와 국궁을 예로써 문화에 있어서 주체성 유무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적절한 설명이긴 하지만 그냥 듣기엔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장기가 있었기에 서양의 장기 즉, 체스가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이 서양의 '장기'로구나하고 인식하고 그것을 분류할 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국궁이 미약하나마 실체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서양의 활쏘기가 전해졌을 때
양궁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었다. 비록 현재 양궁이 국궁보다 더 알려져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축구, 농구가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다르다. 그것이 주체성의 유무이다.
글 속에서 영국인들은 활을 쏘면서 로빈훗을 상상할 것이라 말하였다.
이는 다소 과장된 말일 수 있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양궁을 배운 사람이 어디선가 양궁을 본다면, 외국에 나가서 양궁을 본다면 최소한 스스로가 양궁을 배웠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감정은 나아가 그 나라, 그 나라 문화에 대한 친근한 감정으로 발전할 것이다.
반대로 국궁을 배운 사람들은 주몽과 같은 드라마를 보며, 관심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또 어떤 사람은 어차피 활쏘기가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필자는 대학의 교양체육으로 양궁을 배워보았고, 현재 서울 관악정에서 국궁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양궁과 국궁을 모두 배워본 필자가 보면 그 둘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난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몇가지 차이도 있지만 쏘는 방식이나 손을 쥐는 법, 힘을 주는 방식등 드러나보이지 않는 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런 것이 주체성의 유무가 가져오는 힘일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주체성이다.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무예이야기<18>에서 처럼 한국의 무예문화는 그 주체성을 잃었다.
태권도가 현재 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태권도가 무예보단 근대 스포츠를 닮아 있기 때문이 그 원인일지도 모른다.

여튼 이런 무예에 있어서의 주체성 부족은 무예계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주체성이 있으면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무예에 있어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뒤 늦게 한국의 무예를 찾고자 하였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중국의 무예, 일본의 무예와는 다른 것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전통무예라는 미명하에 나타나는 정말 독특한 무예들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무예가 아니었다. 무예 문화의 주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이리라. 주체성이 있을 때에만 비슷한 속에서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것만을 알 수 있었고, 비슷한 것은 중국의 무예나 일본의 무예와 차이를 찾기도 전에 다른 나라의 무예로 치부되어버렸다.

십팔기의 경우 쿵푸의 하나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십팔기를 익히고 있는 필자가 보아도 십팔기와 우슈의 일부는 비슷하다. 하지만 다르다.
아직은 필자의 언변이 부족하거니와 수련도 부족하여 명확하게 그 차이를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십팔기는 어떤 나라의 무예와 비교해도 비슷하지만 다르다.

인터넷 신문의 문화 연재인 신성대의 무예이야기를 읽다보면
무예란 병장기를 다루는 것을 정의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맨손기술만으로 이루어진 무예는 무예가 아니다라는 과격한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연재글 밑에는 어김없이 반론들이 제기된다. 하지만 필자가 보았을 때 그 반론들은 연재글의 내용을 충분히 알지 못한채 감정적으로 비방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번 포스트에서는 맨손무예와 무예의 관계에 대해서 필자가 이해한 바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맨손무예와 무예의 관계는 신성대의 무예이야기(17) 권법이란 무엇인가? 편에서 좀 이해할 수 있게 풀어써져 있는 것 같다.

무예에서는 병장기를 사용하는 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과거의 무예의 개념에서는 분명 명확히 그랬을 것이다. 병장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이 무예였을 것이고, 권법은 그 무예를 익히기 위한 기본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법이란 것이 무예로서 가치나 수준이 떨어지느냐 그런것이 아니다. 권법은 병장기를 다루는 무예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즉, 권법을 통해서 배운 신체를 쓰는 원리가 병장기술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찌르기를 통해서 비교해보자. 궁전보를 취하여 주먹을 지른다는 권법의 동작과, 창 혹은 검을 들고 궁전보로 찌르는 동작. 이 두 동작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가? 다만 손에 들려있는 것만이 다른 뿐 그 움직임의 요체는 같은 것이다. 주먹을 지를때 발을 궁전보로 디디고 땅을 굳건히 지지하며 밀어주는 것처럼 병기를 들고 찌를 때도 이런 몸을 움직이는 원리들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병장기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맨손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는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권법이 즉, 맨손기술이 맨손무예가 무예가 될 수있으려면, 무예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무예체계란 병장기술과 맨손기술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기본 원리하에 형성되어있어야하며, 그럴때에만 맨손무예는 무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중국의 무예에서도 언제나 병장기술이 따라다녔다. 소림-곤, 무당-검, 태극권-검, 팔극권-창. 이 처럼 어떠한 무예체계를 가지고 있던 곳에서는 병장기술도 자연스럽게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무예에서는 병장기의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무예에서는 병장기를 다루지 않아도 되는가? 물론 다루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무예체계에서 각 병장기의 특성에 따라 권법을 변화시키면 무예로서의 움직임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무예의식이 없는 춤이 되지 않도록

원문보기
'태권도와 택견은 무예가 아니다' 는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신성대의 무예이야기라는 연재글의 제목입니다.

글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태권도는 '전통' 무예가 아니며, 택견은 전통'무예'가 아닌 전통'놀이'이다."
라는 것이다. 물론 태권도의 무예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일단 위의 글에서는 태권도에 대해선 전통의 문제를 논하고 있고, 택견에 대해서는 무예성을 논하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읽기 전엔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주변 친구들에게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심지어 국사를 전공하는 학생도.

태권도가 우리나라의 국기로서 자리잡고 있고 있는 것에 대해서 큰 불만은 없다.
다만 무예를 하는 사람이라면 무인답게 자신들의 콤플렉스인 전통성에 대해서 인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역사를 소급해서 삼국시대의 벽화에 기대는 것은 무인으로서 비겁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활동은 고대의 수렵활동에 기반한 것이 되버릴텐데..

태권도는 전통무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기가 되면서 새롭게 전통을 형성해 나가면 될 것이다. 다만 국기로서 남을 것인가 올림픽 종목으로 즉, 스포츠로 남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발전방향을 새로 모색하거나, 이원화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한다.

택견의 경우는 무예가 아닌 놀이라고 한다.
이 의견을 보고 글을 읽기 전까진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실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복싱이나 레슬링 혹은 K-1과 같은 것을 보고 무예라고 말하진 않는다.
K-1은 이종격투기이니 제외 하더라도, 복싱과 레슬링과 같이 경기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을 무예라고 말하진 않는다.
격투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격투기와 무예는 여러면에서 비슷하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그 구분이 모호해진 것 같다.
격투기에서 무예와 비슷한 기술체계가 있고, 공격과 방어라는 기본 의식으로 움직임이 결정된다.
목적에서는 차이가 날 것이다. 격투기는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것이며, 무예는 생명이 걸린 문제이다. 하지만 현대의 입장에서는 그 차이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격투기와 무예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것저것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필자 역시 그 생각들이 정리가 되지 않아 쓰지 않는다.

여튼, 그런 의미에서 필자도 택견은 무예이기 보단 격투기, 즉 단순한 투기 종목이라 하겠다. 같은 논리로 씨름 역시 마찬가지로 전통놀이가 되겠다.
아, 그러고 보니 씨름은 민속놀이군.








6/7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있었던 한복 패션쇼 중 십팔기 공연 영상입니다.



5/4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앞마당에서 있었던 십팔기보존회의 십팔기 공연

중 쌍검의 모습입니다.

쌍검은 두개의 칼로써 공격과 방어를 하며 보통의 칼보다 약간 짧은 칼을 이용

빠르고 날렵함을 특징으로 합니다.

무예도보통지의 원 쌍검 동작을 좀 더 늘려서 시연하고 있습니다.

 
패션쇼 무대에서 펼쳐진 진검승부

기사내용 일부
7일 오후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열린 2008 서울 단오민속축제 중 한복 패션쇼가 펼쳐지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8.6.7 남산골 한옥마을 한복패션쇼 십팔기 찬조 공연의 한 장면 입니다.

사진은 창과 칼이 겨루는 창검교전의 한 장면입니다.

패션쇼 중간에 정조대왕의 복장을 한 모델들이 나오기 전 10분간

정조대왕 때에 완성된 무예인 십팔기가 시연되었습니다.

용맹한무사

기사 내용중.
7일 오후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열린 2008 서울 단오민속축제 중 한복 패션쇼가 펼쳐지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8.6.7 남산골 한옥마을 한복패션쇼 중간에 찬조출연한 십팔기 공연입니다.

사진은 십팔기보존회 시연단장이신 박권모 사범의 쌍검의 한 장면입니다.

패션쇼 중간에 정조대왕의 복장을 한 모델들이 나오기 전 10분간

정조대왕 때에 완성된 무예인 십팔기가 시연되었습니다.


 
5/4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앞마당에서 있었던 십팔기보존회의 십팔기 공연

그 중 칼과 창이 겨루는 모습 입니다.

옛부터 무예계의 격언(무언武諺)에 장병단용 단병장용이라고 하여
긴 것은 짧게 쓸 수 있어야 하고 짧은 것은 길게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긴 창과 짧은 검이 각각의 특성을 살려 창은 거리를 얻으려 하고 검은 창의 품속으로 파고 들려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여 영상을 보시면 더욱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시연자 십팔기보존회 시연단장 박권모

선진한국체육연맹(SFOMA) 경기지부 창립총회에 있었던 십팔기 시범공연 중 월도 시범입니다.
월도는 자루에 날을 단 것이 달과 같다고 하여 월도라고 하며 언월도라고도 합니다.
삼국지의 관우와 임진왜란 때의 사명대사가 사용했다고 유명합니다.
본 시범은 무예도보통지에 나와있는 월도보를 기본으로 하여 시범을 위해 몇가지 수를 더한 형태의 투로입니다.



시연자 십팔기보존회원 허대영

선진한국체육연맹(SFOMA) 경기지부 창립총회에서 있었던 십팔기 시범 중 권법 시범입니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려있는 권법은 혼자서 투로를 진행하다가 마지막에는 대련으로 마무리하도록 되어있으나 십팔기보존회에서는 그 외에도
해범 김광석 선생님의 권법요결에서 혼자서 수련할 수 있도록 투로로 완결하여 수련을 합니다.
권법요결 상세보기
김광석 지음 | 동문선 펴냄
권법도서


권법은 실제 전투에서는 쓰이는 무예는 아니지만 병장기를 다루는 데 필요한 활발한 신체를 얻기 위해서 수련하고 직접 몸을 부딪히는 대련을 통해서 담력을 기를 수도 있었습니다.

시연자 : 십팔기 보존회원 허대영

본 블로그 주인장입니다^^

서울대학교 전통무예연구회의 2008년 1학기 연구발표회에서의 영상입니다.

곤봉은 무예도보통지에는 2인이 서로 대련하는 형태로 수록되어 있으나
대한십팔기협회의 김광석선생님 저, 조선창봉교정, 동문선, 2002
에서 혼자서 수련할 수 있는 투로의 형태로도 연습합니다.
조선창봉교정 상세보기
김광석 지음 | 동문선 펴냄

위의 조선창봉교정에는 곤봉이외에도 무예도보통지에 실려있는 장병기에 장창, 기창, 당파 등에 대한 실기가 수록되어있습니다.
 
 

원문보기

5월 4일 경복궁 민속박물관 앞마당에서 있었던 십팔기보존회의 공연 기사입니다.

[포토뉴스]전통무예 십팔기 ‘얍’
 
서울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앞마당에서 4일 전통무예 십팔기 보존회 회원들이
무술 시범을 보이고 있다.

<김세구기자>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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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단체들이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를 복원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단체들은 그 무예의 명칭을 십팔기라고 하지 못하고 있다. 십팔기가 전승되고 있었다고 해도 뜻있는 이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무예를 바탕으로 복원을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복원을 내세우며 전통을 내세우는 이들이 가장 기본적인 명칭에서 조차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박금수, 조선의 공식무예의 명칭 '십팔기'에 대한 고찰, 한국체육학회지 46권 제5호, 2007.

  위의 논문에서 말하는 대로 '십팔기'란 조선의 공식무예의 명칭이었다. 복원이냐 전승이냐, 서로를 비난하기 전에 기본적인 명칭부터 명확하게 써야할 것이다. 또한 아래의 글에 써있는 전승계보의 진위에 대해서 확인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바, 그 실기로써 승부하는 것이 무인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하는 본문의 일부이다.

십팔기의 전승계보

...... 십팔기가 이 땅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해방과 6.25가 한참 지난 69년, 김광석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로 십팔기도장을 열면서였다. .....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이 어린 시절, 그의 가족들은 전쟁에 광분하던 일제 말기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한동안 지리산 골짜기 문암(門岩: 장흥군 위치면, 화순군 도암면, 나주군 다도면의 경계 지역으로 원래부터 마을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서 정식 지명은 아니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이란 곳으로 들어가 살고 있었다
 더불어 그 집안(道家)의 내력으로 인하여 수양에 필요한 여러 가지 공부를 하던 중 양생법과 간단한 무예를 연마하여야 했다. 그 시절에는 그의 집안과 왕래하던 여러 수양하는 지인들이 왜경과 일본군을 피해 그곳으로 숨어 들어왔었다고 한다. 그 사람들 중에는 훗날의 6.25 피난 시절 부산에서 만나게 되는 오공(晤空) 윤명덕(尹明德) 선생도 있었다.

...... 오공 선생의 생존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해범 선생이 16세 때 부산에서 다시 만났을 무렵 환갑을 넘기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1890년 전후에 태어나신 걸로 짐작된다. 당시 오공 선생은 항상 일본군과 왜경을 피해다녔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오공선생은) 낮에는 먹고 살기 위해 뛰어다니고, 늦은 밤과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해범 선생을 데리고 뒷산(천마산)으로 올라가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그때마다 오공 선생은 항상 ‘십팔기’를 말씀하셨지만 당시에는《무예도보통지》란 책도 없었으며, 오직 구전심수(口傳心授)로만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팔기를 비롯한 무예 전반에 대한 이론과 실기, 그리고 수양에 필요한 여러 가지 양생법과 한약학을 반강제로 가르치셨던 것이다.

  십팔기 전 종목을 모두 익히지는 못하고 <예도> <본국검> <장창> <장봉> <월도> 등은 이름과 함께 기억하지만, 일부 종목인 <낭선> <죽장창> 등은 무기도 없었을 뿐더러 별도로 익힌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십팔기 이외에도 검법, 창법, 봉술 등 갖가지 기예와 무예이론들을 가르치고 알려주었으나, 당시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기록으로 남길 수도 없었고, 또 어린 마음이라 귀하게 생각지도 않아서 흘려들은 것도 많았다고 한다.

  훗날 기억하기로 당시 십팔기를 비롯해 포승줄 감아 던지는 것 등을 보여주셨던 것으로 봐서 당신께서 젊은 시절 잠시 구한말 무관을 지냈거나, 무관을 지낸 분으로부터 기예를 배우지 않았나 짐작된다고 하였다.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외가의 먼 친척뻘이 된다고 해서 어렸을 적에는 ‘외삼촌’이라고 편하게 불렀던 기억 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수년 동안 지금은 대부분 타계한 여러 무예인들과 왕래하며 서로 교유하였다. 마땅히 수련할 만한 장소가 없어 지인들의 태권도장이나 중국무술도장을 빌려 운동을 하던 해범 선생은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십팔기도장을 개원하여 후학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십팔기’란 이름은 오공 선생의 말씀에 따라 붙였는데, 나중에 《무예도보통지》를 구해 보고서야 스승의 가르침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전에 별도로 익히지 않았던 몇가지 장병기예들도 책을 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역 바로 아래에 십팔기도장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무예계의 어느 누구도 ‘십팔기’를 우리 무예로 인정해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예 우리 것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 심지어 중국 무술로 오해하고 무시하기까지 했다. 물론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쿵후(工夫)가 광풍처럼 유행하던 터라 대부분 중국무술이 아니면 배우려 들지를 않았다.

..... 그러다가 70년대 중반, 일부 중국무술도장들과 합기도인들이 함께해서 <대한쿵후협회>를 만드는 것을 보고, 해범 선생은 십팔기의 보존을 걱정하여 사회단체 <대한십팔기협회>를 설립(76년 결성, 81년 등록)하였다. 이때 선생님을 따르던 약 절반의 중국무술도장들도 함께 대한십팔기협회에 가입했었는데, 이로 인해 중국무술도장에서 쿵후를 익힌 사람들에게도 한동안 대한십팔기협회의 단증이 발급되었었다. .....이때문에 예전에 쿵후를 익힌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도 십팔기를 했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역사의 굴곡과 전통의 단절로 인해 야기된 혼란이었다.

  이후 약 15년 동안 나름대로 ‘십팔기’를 지키고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세인들의 잘못된 인식과 무관심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던 해범 선생은 1983년 그만 도장 문을 닫고 수양 생활로 접어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십팔기는 몇몇 제자들이 운영하는 도장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5년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심우성(沈雨晟) 선생을 만나면서 해범 선생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심우성 선생은 민속학자로서 오래전부터 우리의 전통 춤을 연구하기 위해 전통 무예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출판업자로 하여금 규장각에 있는 《무예도보통지》를 처음으로 영인케 했었다. 그리고 민속답사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닐 때마다 ‘십팔기’를 하는 사람을 수소문했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1985년에서야 우연히 필자와의 인연으로 해범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십팔기의 전승 계보와 실기를 확인한 그는 해범 선생에게 그 실기를 세상에 공개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도보통지 실기해제》(심우성 해제, 김광석 실기, 1987, 東文選)라는 책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20일, 한국민속극연구소 주최로 서울 동숭동의 ‘바탕골 예술관’에서 출판기념회 겸 최초의 십팔기발표회를 공개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우리나라에 비로소 전통 무예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략.....................

  이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십팔기가 보급되어 오다가 2000년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전통무예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더불어 선생의 저서와 공연을 보고 십팔기를 흉내내는 유사 십팔기 단체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예전에는 십팔기를 중국무술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들조차 십팔기와 《무예도보통지》를 들먹이며 정통성을 주장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분명한 사실은 이 모두가 해범 선생이 일평생 십팔기를 지켜오고 보급한 덕분이다.

....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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