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번에는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중 월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월도는 다들 삼국지의 관우가 사용한 무기로 잘 알고들 있을 겁니다.
사실... 관우가 있었던 시절에는 월도라는 무기가 없었다고 합니다만..
여튼 후대의 사람들은 관우가 월도(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전장을 누빈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요.

그 청룡언월도가 바로 월도입니다.
청룡언월도, 언월도, 월도등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도신의 형태가 달과 같다고 하여서 그렇게 불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월도같은 무기의 종류를 대도류(大刀類)라고 합니다.
월도이외에도 중국의 미첨도, 한국의 협도, 일본의 장도(나기나타) 와 같은 것들이 모두 대도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무예도보통지에서는 <병장기>의 내용을 인용하며 봉취도, 굴도, 방도, 조천도, 정로도, 편도, 단도와 같은 다양한 대도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왼쪽의 그림은 무예도보통지에 나와있는 월도의 그림입니다.
오른쪽이 중국식이고 왼쪽이 금식(조선식)이죠.

중국식은 딱 봐도 알겠지만 매우 화려합니다.
그에 반해서 조선식은 소박하죠.
그렇지만 용의 입모양의 자루와
자루끝의 철준과 같이 있어야 할 요소들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점은 무게인데요.
중국의 것은 날이 조선의 것보다 두꺼웠다고 합니다.
때문에 더 무거웠을 것입니다.

무예도보통지의 저자들은 이에대해서 그 근량을 무겁게 할 필요는 없으나 날을 두껍게한 중국의 제도가 사납고 위엄이 있으므로 본받을 만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마상월도에서는 보병의 월도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의 그림을 통해보면
보병의 월도와 기병의 월도는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상에서 쓰는 도는 길어야 하는데 앞으로는 말머리를 지나야 하고 뒤로는 말꼬리를 지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월도의 길이가 중국식은 8척이 넘고 조선식은 7척이라고 하였으니 말가운데에 앉으면 충분히 말머리와 말꼬리를 지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밑의 그림처럼 말이죠.





밑의 그림은 월도총도입니다.


총도에서 보면 좌우로 움직이며 월도로 내리치는 동작이 있습니다.
바로 세번째 줄인데요.
그 세명이 바로 오관참장세입니다.
여기서 오관은 삼국지의 관우가 조조에게서 떠나오면서 지나온 관문들을 말합니다.
참장은 그때 관문을 지키던 장수들을 베었다는 것입니다.
월도와 참으로 어울리는 세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밑의 영상을 통해서 실제 월도를 운용하는 모습을 보시죠.


밑의 영상은 월도의 투로를 변형하여 난이도 있게 각색하여 홀로 공연한 모습입니다.


무비지를 썼던 모원의는 월도는 훈련할 때에 웅장함을 보이는 것이지 진중(전쟁)에서 쓸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하지만 왜한삼재도회를 쓴 良安尙順은 미첨도는 야도(野刀)라서 사용하기 어렵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같은 대도류였지만 일본과 중국의 생각이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요?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월도는 총36세가 (36도법)이 있었다고 말하였으나 아쉽게도 이미 무예도보통지를 정리할 당시부터 모든 세가 전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이상으로 월도편을 마치겠습니다.
2009년 기축년 새해에도 십팔기 보존회의 활동은 계속됩니다.^^

그 시작인 1월에도 이미 2회의 공연이 내정되어 있습니다.

24일과 31일인데요.

24일은 이번 설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입니다.
장소는 경복궁내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강당이고요.
시간은 오후 2시입니다.

설연휴라 어쩌면 지방에서도 오실 수 있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설연휴라 이번 공연을 보실 수 없는 분들 또한 많으시겠네요...

1월 24일 토요일 오후 2시 국립민속박물관 강당에서 펼쳐지는 십팔기 공연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그 다음에는 1월 31일 토요일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십팔기 공연이 있습니다.

온양민속박물관에는 예전에도 한 번 인연이 닿아서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올해에도 기억해주시고 공연을 요청해주시어서 이렇게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지난 토요일 12월 20일에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동지를 맞이하여 행사가 있었습니다.

제목에서 보이시는 것과 같이
2008 궁중문화와 함께하는 작은 설 동지
라는 주제로 하여 여러가지 공연을 하였는데요.
십팔기 공연도 함께하였습니다.
오후 2시 공연이었습니다만
겨울이라 매우 추운 날씨였습니다.

다음은 십팔기보존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공연 사진입니다.
더 많은 사진을 보시려면 -> (클릭)


위의 사진은 쌍수도의 모습입니다.
무대가 좁아서 2명만이 공연하였습니다.
사진으로 보아서는 칼의 길이가 별로 안길어 보이는데요.
실제로는 칼날의 길이만 1미터가 넘는 엄청난 길이입니다^^


이 사진은 등패의 모습입니다.
등패는 등나무로 만든 방패로 가볍지만 질깁니다.
칼은 일반적인 요도를 사용하고요.


장창의 모습입니다.


시연을 마치고 모든 시연자와 사회자 그리고 보존회장님이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나중에 영상이 정리되면 영상도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무예는 제독검입니다.
제독검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 제독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이여송은 다들 아시는 것처럼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왔던 장수입니다.
또한 이여송의 선조가 조선 출신으로 유명하죠.
이여송은 철령위사람이었다고 하네요.
이 철령위는 또한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죠.

고려시대에 명이 철령이북의 땅을 영토로 주장하려하자
고려에서 출병을 하였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결국 조선이 건국되게 되는
이 대목에서 나오는 철령이북의 땅이 바로 철령위를 말하는 것이죠.

여튼 이렇게 이여송은 조선과 나름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제독검은 이여송의 검법이었다거나 이여송이 직접 전수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이여송 제독 휘하의 장수인 낙상지라는 장수를 통해 배운 검법입니다.
더 명확히 말하면
임진왜란기에 유성룡은 군사들을 낙상지에게 보내서 훈련받게 하였습니다.
이에 낙상지는 휘하의 10명을 교사로 삼아서 그들에게 창, 검, 낭선 등을 연습시켰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하는 군요.
무예도보통지의 저자들은 이런 내용을 전하고나서
낙상지가 이여송 제독의 표하 이므로 제독검의 명칭은 여기서 나오지 않았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뭐... 정확한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당시 사람들은 제독검은 이여송의 검법으로 인식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이여송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여송이 동방(우리나라를 말하는 거겠죠)에 있을 때 통진 금씨의 딸을 취하여 시희로 삼아서 몸에 지니고 있던 검을 증표로 주면서 떠날 때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천근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과연 천근을 낳아서 그 후손이 거제에 많이 거주했다고 합니다.
영조때에는 천근의 현손(고손자)에게서 앞서 말했던 검을 받아서
이여송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칼에 새기고 칼집을 장식하여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적에는 이여송가에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

제독검도 예도와 마찬가지로 요도로 수련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여송이 남기고 갔다고 하는 검은(정확히는 도입니다만)
곧은 형태로 직도였습니다.
또한 그 칼은 이여송가에 돌려주기 전, 즉  200년쯤 후에도 녹슬거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독검은 총 14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은 그 시범영상입니다.

좀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그간 좀 바빴던 터라;;; 죄송합니다..)
이번에 소개할 무예는 쌍수도와 왜검 그리고 교전 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죠.
바로 왜로부터 기원한 무예라는 것입니다.

물론 차이점도 있습니다.
쌍수도의 경우 왜의 칼을 보고 그것을 모태로 하여 만든 것이고
왜검은 왜에 가서 직접 배워온 것이며
교전은 배워온 왜검을 토대로 창작한 것입니다.
여하튼 이 세가지는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중 그 기원을 일본에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럼 우선 쌍수도부터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쌍수도는 여러가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쌍수도란 이름은 양손을 사용한다는 문구에서 비롯된 것이구요.
그 외에 용검, 평검, 장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쌍수도는 본래 장도長刀라는 이름으로 무예제보에 수록되었습니다.
당시 무예제보는 왜군을 상대하기 위한 전법인 절강병법의 원앙진에 필요한 시급한 무예를 수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쌍수도 즉 장도는 원앙진에는 필요 없는 병장기 였으나 무예제보에 수록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총수에게 쌍수도를 들도록 하여 조총사격후에 근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또한 가왜라고 하여서 군사훈련시 가짜 왜군 역할을 하는 병사들이 쌍수도를 들도록 하였던 것 입니다.

쌍수도는 원래 칼날의 길이가 5척이며 그 중 동호인(날을 보호하는 구리)이 1척 자루가 1척5치로 총 6척 5치의 길이였다고 합니다. 환산하면 총 길이가 거의 2미터 가까운 엄청난 길이죠... 
무예도보통지에 이르길 왜인들은 1丈을 뛰어와서 칼을 휘둘러 병사들을 양단했다고 합니다.
이 기세에 병사들이 눌려서 대적하기 힘들었다고 하고요.
만약 사실이라면 5미터 전방에 있던 적이 한 순간에 가격을 하였던 셈이니 엄청났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때에는 이미 제도가 바뀌어 검법은 쌍수도를 운용하는 검법이었지만 칼은 요도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무겁고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다음은 쌍수도의 총도입니다.
전진한 후에 초퇴방적, 재퇴방적, 삼퇴방적세로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원지로 돌아가라고 적혀있고 다만 그림 표기는 한 번만 하였는데요
이 것은 한 번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생략한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음은 왜검입니다.
왜검은 같은 이름으로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수록되었었지만...
그 내용은 다릅니다.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는 교전의 형태였죠.
또한 기효신서에서 비롯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의 왜검은
숙종 당시 김체건이란 군관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 비법을 얻어온 것이었던 겁니다!!! (스파이죠. 지금으로 치자면.. 군사기밀을 빼온 셈이니..)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일본도의 우수함은 세계에 알려져 있었나 봅니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자들도 왜검의 우수함을 인정하며 중국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적어놓았습니다.

왜검보에는 4가지 유파의 검술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 유파는
토유류, 운광류, 천류류, 유피류 입니다.
김체건이 이 4가지 유파의 검술을 얻어왔으나 이미 산실되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에는 운광류만 행해졌다고 합니다.
이 4가지 유파의 검술은 일본에도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조선세법은 중국에서 찾아오고... 왜검은 조선에 있고... 참 아이러니 하죠;;
이에 대해서 그 유파의 검술이 일본을 대표할 만한 검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이라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조금 궁색하기도 합니다.

여튼 이렇게 4가지 유파의 검술이 있기 때문에 왜검편에는 총도가 4개 수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교전보까지 합치면 5개가 수록되어 있는 거죠.
교전은 앞서 말한 것처럼 왜검을 바탕으로 김체건이 새롭게 창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따로 교전보라고 칭하였으나, 본디 왜검에서 비롯된 것이라서 왜검보의 뒤에 함께 붙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교전보는 양날의 검으로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외날인 요도로 하였다고 합니다. 교전을 수련하는 중의 사고를 염려해서라고 하네요.
그래서 교전을 익힐때는 가족으로 몇 자되는 나무를 감아싸서 요도를 대신하여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칼을 목도라고 하였다고 하네요..

쌍수도와 달리 왜검과 교전에는 세명이 없습니다.
교전을 시작할때에 견적출검세가 있긴 하나. 그 뜻을 풀이해보면 알 수 있듯이(적을 보고 검을 뽑는..) 그리 의미 있는 동작은 아니죠..
대부분의 설명이 우수우각 혹은 우수좌각 등 손과 발의 좌우를 통해서 동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왜검과 교전의 총도에는 세명 없이 그림만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혹시 그림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면 다른 것들에 비해서 찾기가 더 힘들것 같군요^^;

밑에는 교전보의 그림 중 하나 입니다.

이하는 십팔기보존회의 쌍수도 시연 영상입니다.
2미터는 되지 않지만 실제크기의 쌍수도에 가깝게 재현하여 보았습니다.


이상으로 쌍수도와 왜검, 교전 편을 마칩니다.^^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본국검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국검은 그 명칭에서 부터 한국 고유의 전통무예라는 기운이 팍팍! 풍기기 때문이겠죠.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합기도장의 한켠에 본국검 총도가 걸려있었습니다.
검도를 하는 단체 중에서 본국검을 모르는 단체는 없을 겁니다.
또한 본국검협회라는 사단법인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무예단체들이 전통무예를 표방하면서 본국검의 명칭을 많이 이용했죠.
네이버에서 "본국검의 비교" 라는 키워드로 검색하시면 다양한 단체의 본국검 영상을 한꺼번에 올려놓은 게시물이 검색됩니다.
한번 비교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딴소리는 이만하고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본국검에 또 다른 명칭으로 신검(新劍)이라고 불립니다.
이 본국검은 예도와 같은 요도로써 수련합니다.
본국검의 기원을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자들은 신라의 화랑이었던 황창랑에서 찾습니다.
나이가 7세였던 황창랑이 저자에서 검무를 추어 유명해지고
백제왕에게 불려가 검무를 추게 되었는데, 이 기회를 틈타 백제왕을 찔러 죽이고 백제인에게 죽었다는 <여지승람>의 고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검무 중에 황창랑과 관련된 검무가 아직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러한 이유로 신검이라는 별칭이 신라검의 신검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세법 24세를 통해서 새롭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신검이라고 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앞서 2008/11/24 - [무예/십팔기] -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7) - 예도
에서 무비지에서 검법을 조선에서 얻어왔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고 소개했었습니다.
본국검의 설명에서도 그 이야기가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본국검의 연기(緣起)를 황창랑으로 인하여 신라로 잡지만, 신라때의 검술인가에 대해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고 말하며
모원의가 조선에서 검보를 얻었다고 하였으나..
그 창안과 그 저수는 물론하고 모원의의 세대와도 시간이 흘러 상호간에 주고받은 것이 누구인지도 확실히 모른다.
본국의 사람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전수하고 스스로 이습하지 아니하고 꼭 무비지를 기다려서 전습하는 지 모르겠다. 하며 본국검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도와 본국검에 있어서는 조선의 무예에 대한 자존심이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본국검은 그 이름에서 이미 本國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또한 예도와 본국검은 다른 검법에 비하여 세가 많아 투로가 깁니다.
그만큼 어렵기도하구요.

아래는 본국검 총도입니다.
밑의 본국검 영상과 비교하여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 7번째 이야기 입니다.
저번 6번째 등패와 낭선을 소개함에 따라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 중 찌르기의 무예가 완결 되었습니다.

예전에 무예도보통지라는 책을 설명하면서 무예도보통지는 십팔기를 3가지로 구분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찌르기, 찍어베기, 치기 의 세 종류였는데요.
찌르기는 창류, 찍어베기는 검 혹은 칼, 월도 등이고요, 치기는 권법과 곤봉 편곤의 류입니다.
그래서 찌르기는 이제 다 소개하였고요.
드디어 칼입니다.

칼이라고 하니 좀 품위가 없군요.. 도검류? 검술?
여하튼 찍어베기의 무예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칼을 사용하는 무예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그 분량도 총4권 중 2권과 3권의 두권을 차지하고 있죠.
사실.. 이미 전 편에서 등패를 통해서 이미 찍어베기의 무예가 소개되었습니다.
등패는 사실 방패이지만 요도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무예도보통지 내에서 찍어베기 무예의 분류 중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이번에 소개해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도입니다. 본래의 명칭은 단도(短刀)였다고 합니다.
혹은 조선세법이라고도 합니다.
조선세법이라고 하는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때에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모원의의 무비지를 많이 참조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 모원의의 무비지에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옛날의 검은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당태종 때에는 검사가 1천명이나 있었다. 지금은 그 법이 전하지 아니하고 단간잔편 가운데 결가가 있으나 그 설명이 자세하지 못하다. 근래에 호사자가 있어서 조선에서 그 세법이 구비된 것을 얻었다."
이렇게 말하며 모원의는 그 세법 24가지를 조선세법이라 명명하여 무비지 검편에 적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를 만들 당시 조선은 이 조선세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조선에서도 진실로 조선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해 받았다는 사람이 말했으니 아마도 조선에서 간 것이 맞겠죠?
이 때문에 이 예도를 조선세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예도보는 이 때문에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예도보는 무비지의 검편에 조선세법을 다시 그려서 24세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예도의 경우 투로의 형태가 아닌 각각의 세의 나열이라는 형태로 적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원 무비지에는 없는 4가지 세인 태아도타세, 여선참사세, 금강보운세, 양각조천세,
를 더하여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총도와 총보의 경우에는
앞서 예도보와는 달리 투로형태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도보에 나와있는 28가지 세를 전부 사용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해범 선생님의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중 칼류를 해제한 본국검에서는
본국검
카테고리 취미/스포츠
지은이 김광석 (동문선, 1995년)
상세보기
예도보는 조선세법24세라는 표현으로 해제하시고
예도총보를 예도라는 이름으로 2가지로 나누어서 해제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 두가지 모두 예도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도 총도입니다.


다음의 영상은 십팔기보존회에서 조선세법의 24세를 연결하여 시연한 것입니다.



그 다음 영상은 EBS 다큐프라임 영상무예도보통지에서 예도총도를 재현하는 장면입니다.


아 그리고 이 무예도보통지의 예도편에서는 당시의 칼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전에 장창에서 그랬듯이 이 예도는 환도(요도)를 사용하는 첫 종목이기 때문에 칼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철에 대한 내용이지요.
옛날의 칼과 철의 재련법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이 부분을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예도편이었습니다.

장충단(獎忠壇)과 십팔기옛터(十八技舊地)<--인터넷신문 데일리안 칼럼 보러가기

장충단을 아시나요?
장충단은 지금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장충단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만 대부분 알고 계실 뿐... 장충동 족발만을 다들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이 장충단은 사실 1900년 고종의 명으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장병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祭壇)입니다.
이 정도까지는 알고 계신 분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장충단이 조선의 무혼이 깃든 장소라는 것은 대부분 모르실 겁니다.
가장 위에 링크를 통해 칼럼을 읽어보시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 장충단이 만들어진 곳은 조선전기부터 계속해서 군인들이 훈련하는 터였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당시 이 일대는 남소영, 남별영, 그리고 화약무기고 와 같은 시설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비파정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훈련도감군의 무예수련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무예는 다름아닌 십팔기였겠죠.

그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장충단에 그러한 배경이 있었다고 하니 관심이 가네요.
현재 장충단공원이 혹시 변하게 된다면 조선시대의 무혼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전 아리랑TV의 Korea Now라는 프로에서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 마르코가 한국의 여러가지 무예를 배워보는 기획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십팔기, 택견, 고무도 등 5가지의 무예를 찾아가서 배우는 데요.
그 첫번째로 방영되었던 것이 십팔기였습니다.
몇일을 와서 배웠지만 실제 방영시간은 10분 정도였습니다.

아래의 영상은 그 방영분입니다.
영상 속에는 전에 소개했던 황학정에서 열린 제2회 활쏘기 백일장에서 십팔기보존회가 시범보이는 장면도 나오네요^^

이번에 소개하는 무예는 등패와 낭선입니다.
낭선으로써 찌르기 종류의 무예는 마지막입니다.
거기에 왜 등패를 같이 소개하는가 하면,
이 등패와 낭선은 진중에서 그 쓰임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등패와 낭선은 여러 병장기로 진형을 이루었을 때
수비를 담당하는 병장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럼 등패부터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등패는 등나무를 엮어서 만든 방패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등패인 거죠.
그 모양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오른 쪽의 등패가 중국의 양식이며 가운데 2개가 조선시대의 양식입니다.
그 차이는 등패의 크기입니다.
무예도보통지에서 말하길 "지금의 제도는 등패의 직경이 3척 7치로 앉아서 은신하기에 부족하다. 마땅히 조금 넓혀서 화식처럼 한다." 고 하였습니다. 주척으로 보면 90센티가 조금 안되는 길이네요.
그리고 손잡이부분을 만드는 방식도 다르다고 하네요.

등패는 요도와 함께 쓰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밑의 그림처럼 말이죠.
요도는 허리에 차는 칼이란 뜻으로 요도라는 명칭에는 특별히 규격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본국검, 쌍검 도 모두 요도라고 말하지만 그 길이와 형태는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
여튼 등패의 요도는 본국검이나 제독검 등에 사용하는 요도보다는 짧으며 쌍검보다는 약간 큰 편입니다. 그리고 휘어져 있는 모양이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의 그림에는 별로 휘어져 보이진 않네요;;;

또한 등패수들은 표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표창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본 닌자들의 표창은 아닙니다.
이 표는 던져서 살상하는 무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서 그러한 무기들을 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의 선두에 있다가 적이 다가오면 표창을 던지고 바로 요도를 뽑아 들어서 돌격하였다고 하는군요.
중국과 조선에서 사용한 표창은 그야말로 짧은 창의 형태로 처음 그림의 가장 왼쪽과 같았습니다.

이 등패의 기원은 무예도보통지에서 밝혀놓은 것으로 보면 중국의 남만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베트남 쪽이 되는 건가요?
여튼.. 삼국지에 보면 등갑병이 나오죠?
그 등갑병의 등도 또한 등나무의 등자입니다.
무예도보통지의 등패편에는 이 등갑을 만드는 법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圖說>에 이르길 "적등 50근을 석조(돌로만든통)에 넣고 보름동안 침수시켜 건져내어 3일간 햇볕에 말렸다가 다시 석조에 넣고 물을 더 붓는다. 이와 같이 물이 충분히 스며들도록 한 번 두루 하는데 1년 동안 하여 햇볕에 바짝 말린다. 엮어서 꿰는 법식은 모두 20개로 나누어서 그 곁에는 오동나무 기름을 바르는데 기름을 칠한 그 등갑은 가볍고 견고하여서 능히 화살과 칼날도 막을 수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네요.
여튼 중국의 기록에서 보면 남방에서 남만이 등패와 표창을 잘 썼다는 기록이 여럿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기원을 남만이 아니었겠는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등패 총도와 십팔기보존회의 등패 시범 영상입니다.
총도와 비교하면서 보시면 좋은 것 같습니다.

다음은 낭선입니다.
낭선이라는 이름은 정말 생소하실 것 같습니다.
낭선은 대나무의 끝에 날을 달아 사용하는 창으로 그 가지를 9층을 살려서 방어의 기능을 높인 무기입니다. 밑의 그림을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낭선의 길이는 장창과 같아서 1장 5척입니다. 약 3미터가 넘는 길이입니다.
그런데 낭선은 왜 그 가지를 그대로 남겨두었을 까요?
그것은 낭선의 가지의 끝에 날을 달아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낭선은 척계광이 왜군과 상대할 때에 논에서 전투가 있을때 진의 주변에 철질려나 거마목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낭선을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 가지끝에 붙어 있는 날에는 독약을 발라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등패편에 보면 등패는 반드시 낭선의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써놓았습니다.
낭선을 통하여 등패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등패는 방패이니 당연히 방어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낭선 또한 이처럼 등패를 엄폐하여 등패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고 또한 낭선자체도 크기를 통하여 진형 전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래의 영상은 EBS 다큐프라임 영상무예도보통지 1부 무의시대 중 한 장면입니다.
조선시대의 병사들이 진을 이루어 일본군과 접전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앞에 등패와 낭선이 도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등패와 낭선은 진에 선두에서 방어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등패와 낭선의 비호아래 장창과 같은 공격력이 강한 무기로서 적을 제압하였던 것이죠.

이 동영상에는 앞서 설명했던 장창, 당파 또한 등장합니다. 또한 그 외에도 조총과 활쏘기가 등장하여 조선시대의 전법을 단병과 장병을 통틀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등패, 낭선, 장창(2), 당파> X 2 이런 형태를 원앙진이라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동영상을 통하여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상 등패와 낭선 편이었습니다.


좀 늦었지만 11월달의 십팔기 보존회 공연 안내입니다.
11월에는 다음에 보시는 바와 같이 십팔기 보존회의 공연이 계획되어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 토요상설공연
2008년 11월 15일 3시 
국립 민속 박물관 대강당 

국악대축제
2008년 11월 30일 (시간 미정)
서울시  국악로 
주최 : 국악로문화보존회

15일(土)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하는 공연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말에 우리민속한마당이라고 하여
토요일은 토요상설공연, 일요일은 일요열린민속무대 라는 제목으로 하는 행사입니다.
11월 15일 토요일에는 십팔기를 공연하기로 되어있구요.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 에서 
소개마당 페이지에 우리민속한마당 공연을 보시면
이번 달에 계획되어있는 공연에 대한 안내를 해놓은 PDF파일을 받아보실수 있습니다.

30일(日) 서울시 국악로(종로묘동사거리 일대) 에서 하는 공연은
국악문화보존회에서 주최하는
국악로 국악대축제 혹은 국악로 국악한마당축제 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종로구 관련 홈페이지에 가보면 이 달의 축제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습니다.
아직 정확하게 올해의 행사일정이 나온 것 같진 않습니다.

이거... 남한산성 등산문화축제 공연 하나로
너무 재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만;;;



이 영상은 14분 정도 되는 공연 장면 전체에 해당하는 것 입니다.
제가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 연재를 통해서 이미 설명한 기예도 있고
아직 연재하지 못한 여러가지 기예가 나옵니다.

십팔기의 다양한 기예들을 먼저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소개할 기예는 당파입니다. 위의 그림에 병사가 들고 있는 것이 바로 당파입니다.
흔히 삼지창 정도로 알고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요새는 줄어들었습니다만... 예전에 사극에서 포졸들이 항상 들고나왔던 병기가 바로 이 당파였습니다. ^^
그 때문에 당파를 병졸들이 들고다니는 하찮은 무기로 여기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파는 매우 담이 있는 병사가 써야하는 무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당파의 세 갈래의 날을 이용해 적의 무기를 방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파는 창에 비해서는 짧은 편입니다. 아무래도 힘을 써야했기 때문이겠죠.
앞서 장창편에서 말씀드렸듯이 장창의 길이는 15척이었던 반면에 당파의 경우는 7척 6치 정도로 거의 반정도밖에 안되는 길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병기를 방어하기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죠.

그리고 또한 척계광의 기효신서에서 기예를 시험하는 비교편에 당파에 대한 내용에는 창과 대적하는 시험을 보는데, 이는 매우 어려워서 10번시도하면 9번은 실패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시험하느냐.. 창이 찔러들어올때에 병사가 얼마나 동요하지 않는가가 그 평가기준이었던 것입니다.




위의 그림처럼 무예도보통지의 당파편에는 세가지 종류의 당파가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쪽에서부터 살펴보면 가장 오른쪽의 것이 무예도보통지의 주요 참고도서인 기효신서와 무비지에 실려있는 당파의 그림입니다. 중국의 법식인 것이죠.
그 다음 가운데에 있는 것은 훈련도감에서 명나라의 것을 구입한 것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의 특징은 세 개의 창날이 합쳐지는 부분에 주석으로써 합쳐서 만든 것입니다. 때문에 견고하고 예리하다고 하네요.
마지막 가장 왼쪽의 것이 우리나라의 형식인데요.
우리나라의 경우 세 개의 날을 따로 만들어서 가운데 날 가운데 구멍을 뚫고 양쪽의 날을 조립하여 탈착이 가능하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때문에 새로 만드는 것은 2번째 명나라제와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써놓고 있습니다. (당파의 경우는 중국제가 더 좋았네요;;; ㅎㅎ)

당파(鎲鈀) 는 흔히 파鈀라고만 하기도 합니다. 무예도보통지에서 말하길 이 파를 사용하는 무가가 다섯이 있다고 합니다. 웅우출진파, 산문칠매복파, 번왕도각파, 직행호파, 초란근진파가 그것이라고 합니다. (이 때 파는 당파할때 파입니다;;; ㅎㅎ)
그리고 파鈀는 곧 차叉라고 모원의가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叉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으로는 닌자거북이의 빨간.. 라파엘이 쓰는 것을 흔히 쌍차라고 하더군요..




이 당파의 경우 화전을 발사하기위한 지지대의 역할도 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위에 보시는 사진처럼 말이죠.
화전은 화살에 화약통을 달아서 화약의 추진력을 통해서 날라가는 일종의 로켓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얼마전 영화로 나온 신기전도 화전의 하나인 것이죠. 제가 알기로는 가장 큰 화전이 신기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신기전화차에 신기전이란 화살을 꽂아서 다연발로켓포가 완성되는 것이었죠.
이를 위해서 무예도보통지에도 당파를 만들때 두 곁가지를 평평하게 하여야 한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위에 보시는 것은 당파의 총도입니다. 

 
이것은 제11회 광주왕실도자기축제에서 있었던 당파의 시연모습입니다.
개인기술로 시연함에 따라 무예도보통지에 있는 당파의 투로에 기반하여 몇가지 창법을 첨가하여 시연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상으로 당파편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11월 1일에 남한산성 등산문화축제에 대한 안내를 해드렸습니다.
등산문화축제에서 십팔기 공연이 있을것이라는 이야기도 해드렸는데요.
그 관련기사와 동영상이 떠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위의 사진은 십팔기 공연에 참가한 십팔기 보존회 시범단과 대한궁술원을 운영하시는 황학정의 장영민 접장님의 모습입니다.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 기사에 등산문화축제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설명되어있는데요. (바로가기)

저는 공연을 하느라 산에 함께 올라가서 참여할 순 없었지만..
행사를 지켜보니 단순히 즐기는 축제가 아닌
올바른 등산문화의 정착을 위한 행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축제 당시 공연 영상입니다.


 위의 영상은 십팔기 중 곤봉 (혹은 장봉)의 시연 모습입니다.

그외에 월도와 창이 겨루는 월도창교전의 영상이있습니다.




일전에 이미 EBS에서 제작한 다큐 <영상무예도보통지>에 대해서 알려드린 바가 있습니다.
바로 이거죠 ---->> (2008/07/20 - [무예/십팔기] - EBS 다큐프라임 "영상 무예도보통지" 1부 - 무의 시대 다시보기)

위의 영상은 다큐의 내용 중에 일부를 잘라놓은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전체를 다시보고 싶으시면 전에 써놓은 글의 링크를 통해서 이동하시면 됩니다.^^
위의 장면은 십팔기보존회의 시범단장 및 시범단이 수고하여 주셨습니다.
영상의 컨셉은 보시는 것과 같이 십팔기를 익힌 고수 1인과 자객 3인의 결투입니다.
십팔기를 익힌 고수는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실기를 담당하였던 백동수를 모델로 하였습니다.

월도를 들고 백동수역할로 연기해주신 분이 시범단장님이시며,
창, 왜검, 쌍검을 들고 자객 역할을 하신분들은 십팔기보존회의 시범단원분들입니다.

십팔기보존회에서는 십팔기를 수련하면서 무예도보통지에 나와있는 여러가지 기예를 이용하여, 합을 짜서 겨루는 교전을 연습하고 또한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교전은 월도와 창이 겨루는 월도창교전, 그리고 창과 칼이 겨루는 창검교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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