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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화 조총은 어떻게 동아시아 역사를 바꿨나?(feat. 미르)

안녕하세요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게스트로 오신 조선시대 전공자 미르선생님과 함께 조총, 무예 등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집: 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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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팟캐스트에 게스트로 참여했습니다. 

 

조총과 임진왜란 / 조선의 무예서 각각 2화씩 총 4화 예정입니다.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네요 

경상남도 진주시에서는 10월초에 개천예술제,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같은 축제를 몇년간 지속해왔습니다.

이러한 축제기간에 맞추어서 진주성안에서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맞서 싸워 이긴 1차 진주성전투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공연을 해왔습니다.

2012년까지는 뮤지컬 진주대첩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한 작품이

작년 2013년 부터는 '촉석산성 아리아'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공연되었습니다.

 

올해는 10/8,9 양일 저녁 진주성 공북문 안 특설무대에서

이 촉석산성 아리아가 공연될 예정입니다 .

십팔기보존회에서는 지난해에 이어서 이 공연에 무예지도 및 출연을 하게되었습니다.

 

지금 공연이 일주일 남아서 막바지 연습이 한창입니다.

아래는 공연연습 장면입니다.

 

 진주성을 공격해오는 왜군들입니다.

 여성분들은 무용을 하시는 분들인데요. 공연 중에 함께 검무를 한다고 합니다.

 보존회 시연단원들과 호흡을 맞추어 연습중입니다.

공연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개별장면에 대한 연습을 마치고 본격적인 공연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오프닝에 해당하는 장면인데요.

가운데 주인공인 김시민장군과 여주인공이 보이네요.

김시민장군은 어디서 많이 본 분인거 같은데요.

다음 주에 공연장에서 누구인지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음... 전 다 좋은데 왜 제목을 촉석산성이라고 했을까 라는 의문이 조금 들더군요.

촉석산은 사실 따로 있는데 말이죠 ㅎ

여하튼 진주성에서 벌어진 진주대첩을 모티브로 한 뮤지컬 작품이라고 합니다.

10/8.9 이때 진주로 여행할 계획이 있으셨던 분들은 가신김에 저녁때 뮤지컬 한 편 보고 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논문이 나온지는 조금 되었습니다만

소식을 전하는게 늦었습니다.

그간 블로그도 너무 오래 방치해두었네요 ㅎㅎ

요즈음엔 박사과정을 진행중입니다.

일년 쉬었다가 수업을 들으려니 어색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여하튼, 석사논문의 제목은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전술 변화와 군사훈련의 전문화" 입니다.

아래는 논문 내용의 요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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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군제는 건국 초 정도전이 《陣法》을 편찬한 이래로 《陣圖之法》(1421), 《癸丑陣說》(1433), 《五衛陣法》(1451)과 같은 일련의 병서를 편찬하여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정비되었다. 이를 통해서 병종, 병력동원, 지휘체계, 무기 등 軍事(military affair) 전반의 체계가 《오위진법》을 기반으로 한 오위체제로 일원화되었다. 오위체제 하의 군인은 뛰어난 신체능력에 기반을 둔 무예 기량을 가진 戰士로 구성되었으며, 그에 따른 훈련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조선 초기 군사훈련의 목적은 통일된 지휘체제의 확립이었다. 이를 위해 講武를 위주로 한 집단훈련이 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강무에서 주된 공격은 기병들의 궁시 사격으로 이루어졌고, 기병의 사격능력은 훈련으로 향상시키기보다는 군사 개개인의 기량에 의존하였다. 세종대 이후 전국적인 군역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의무군역인 정병이 대거 군사로 편입되었다. 때문에 이전과 같은 훈련방식으로는 군대의 기량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비교적 전투능력이 떨어지는 구성원을 대상으로 집단적인 움직임을 통해 전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군사훈련의 형태는 진법을 통한 모의전투형식인 閱武로 변화해 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전기의 전술체계는 기병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러한 전술체계에서는 정예기병의 확보가 가장 중요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이하였고, 조선전기 이후 오위체제로 유지되었던 조선의 군사제도는 임진왜란이라는 유래 없는 대규모의 전쟁을 겪으면서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특히 전투를 수행하는 구성원의 질적인 변화가 크게 일어났는데,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個人火器의 등장이었다. 임진왜란은 전장에 개인화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전쟁이었다. 개인화기의 등장은 살상능력이 더 이상 개인의 신체적인 능력과 관련되지 않고 훈련과 전문기술에 의해서 결정되게 한다는 의의가 있다. 새로운 무기는 군대의 동질화를 초래하였고, 이는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아시아의 전장에서도 개인화기의 등장은 전쟁규모를 확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명이나 일본의 경우 개인화기가 도입되면서 전투 비전문계층이 대거 군인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에 따라 보병의 전술적가치가 증가하고, 전쟁이 대규모화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전쟁양상의 변화를 경험한 조선은 새로운 전술과 이를 뒷받침할 훈련체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하였던 것은 명나라의 병서인 《紀效新書》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기효신서》의 내용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면서 조선은 기존의 오위체제에 따라 체계화되어 있던 전술, 훈련, 편제 등의 軍事 전반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기효신서》에서는 개인기량이 뛰어난 군사보다는 담력이 있고 성실한 일반민들을 군사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각각의 군사를 역할에 맞게 나누어 선별하여 배치하였고, 한 가지 기예를 꾸준히 훈련시켰다. 또한 엄격한 군율과 연좌법을 적용하여 기율을 엄하게 유지하였다. 《기효신서》의 내용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요구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기효신서》의 제도를 의욕적으로 수용하였다. 새로운 전술이 도입되자 이에 맞는 훈련을 수용하였고, 전술과 병학의 이해가 심화되면서 《기효신서》의 내용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훈련의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그 결과 중앙군은 훈련도감, 지방은 속오군으로 명명되고 砲手, 射手, 殺手의 三手兵으로 편성되었다. 단순히 《기효신서》의 훈련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구체화하고 전문화하였다. 이를 통해 군사훈련은 습진이라는 형식으로 수행되었다.

《기효신서》를 통해 정립된 조선의 전술은 북방의 女眞 기병이라는 새로운 적이 등장함에 따라 변화가 필요하였다. 광해군 초기에는 《練兵實記》의 전술을 수용하여 車騎步전술을 적용하여 기병의 양성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기병양성은 조선전기와 같은 기병위주의 전술로 회귀한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대의 보완된 전술은 보병중심으로 고도로 조직화된 상태를 유지하였고, 기병 또한 이전과는 달리 조직화되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11년(1619) 深河전투에서 패배함에 따라 여진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전술 보완이 조선의 향후 과제가 되었다.

임진왜란기 화약무기가 전장에 보급되고 군대의 대규모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전술은 고도로 조직적으로 변화하였다. 조직적인 전술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전문화된 군사훈련이 필요하였으며 그 결과 전문적인 군인에 의한 지속적인 군사훈련이 군사력 건설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에 따라 군대를 조직하고 군사력을 건설하는 일이 과거 다른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개별 병종별로 특화된 훈련이 요구되었고, 개별 훈련이후에 집단훈련을 받아야만 군사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군사훈련을 위한 비용을 국가에서 담당해야 했다. 즉, 군사훈련의 전문화로 인해 군사력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서양의 상비군 형성과는 차이가 있지만, 조선에서 군사 훈련을 국가적으로 관리하게 된 것은 조선적인 상비군 체제가 성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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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무예는 제독검입니다.
제독검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 제독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이여송은 다들 아시는 것처럼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왔던 장수입니다.
또한 이여송의 선조가 조선 출신으로 유명하죠.
이여송은 철령위사람이었다고 하네요.
이 철령위는 또한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죠.

고려시대에 명이 철령이북의 땅을 영토로 주장하려하자
고려에서 출병을 하였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결국 조선이 건국되게 되는
이 대목에서 나오는 철령이북의 땅이 바로 철령위를 말하는 것이죠.

여튼 이렇게 이여송은 조선과 나름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제독검은 이여송의 검법이었다거나 이여송이 직접 전수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이여송 제독 휘하의 장수인 낙상지라는 장수를 통해 배운 검법입니다.
더 명확히 말하면
임진왜란기에 유성룡은 군사들을 낙상지에게 보내서 훈련받게 하였습니다.
이에 낙상지는 휘하의 10명을 교사로 삼아서 그들에게 창, 검, 낭선 등을 연습시켰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하는 군요.
무예도보통지의 저자들은 이런 내용을 전하고나서
낙상지가 이여송 제독의 표하 이므로 제독검의 명칭은 여기서 나오지 않았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뭐... 정확한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당시 사람들은 제독검은 이여송의 검법으로 인식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이여송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여송이 동방(우리나라를 말하는 거겠죠)에 있을 때 통진 금씨의 딸을 취하여 시희로 삼아서 몸에 지니고 있던 검을 증표로 주면서 떠날 때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천근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과연 천근을 낳아서 그 후손이 거제에 많이 거주했다고 합니다.
영조때에는 천근의 현손(고손자)에게서 앞서 말했던 검을 받아서
이여송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칼에 새기고 칼집을 장식하여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적에는 이여송가에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

제독검도 예도와 마찬가지로 요도로 수련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여송이 남기고 갔다고 하는 검은(정확히는 도입니다만)
곧은 형태로 직도였습니다.
또한 그 칼은 이여송가에 돌려주기 전, 즉  200년쯤 후에도 녹슬거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독검은 총 14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은 그 시범영상입니다.



시연자 십팔기보존회 시연단장 박권모

선진한국체육연맹(SFOMA) 경기지부 창립총회에 있었던 십팔기 시범공연 중 월도 시범입니다.
월도는 자루에 날을 단 것이 달과 같다고 하여 월도라고 하며 언월도라고도 합니다.
삼국지의 관우와 임진왜란 때의 사명대사가 사용했다고 유명합니다.
본 시범은 무예도보통지에 나와있는 월도보를 기본으로 하여 시범을 위해 몇가지 수를 더한 형태의 투로입니다.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양장본) 상세보기
정두희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16세기 동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전쟁, 임진왜란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은 임진왜란을 동아시아 세계의 국제적 관점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센터가 임진왜란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2006년 6월 경남 통영에서 '임진왜란: 조일전쟁에서 동아시아 삼국전쟁으로'란 주제로 4일간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의 성과를 정리하였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전쟁 자체의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은 임진왜란이란 전쟁을 한국, 일본 혹은 중국의 각 나라의 일국사의 관점에서 벗어나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책이다.
  임진왜란은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임진 정유 왜란으로 불리고, 일본에서는 문록 경장의 역, 혹은 히데요시의 조선침략(혹은 조선정벌), 중국은 위안차오센(援朝鮮)으로 불린다.
 세계사적으로는 어떠한 공식명칭도 정해진바가 없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 라는 전쟁사 책에 도요토미의 조선침략을 저지한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이런 임진왜란을 한국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기억하고 평가하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 히데요시에게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란 전쟁은 전쟁의 주체만 해도 직접적으로 조선, 일본, 명의 삼국과 명나라의 군대에 함께 참전한 타이, 인도, 그리고 네덜란드인에 이르는 많은 나라들이 참여한 세계전쟁이었다.
  게다가 전쟁의 결과로 명나라를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세계체제가 명나라의 붕괴와 함께 청의 등장으로 재편되었으며, 일본은 히데요시로 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그 주도권이 넘어갔다. 조선은 막심한 피해를 입고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을 내세우며 후에 청나라 중심의 국제정세에서 외교적인 유동성을 잃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이순신과 의병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안목에서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고, 그에 따라 임진왜란이란 명칭보단 가치중립적인 임진전쟁(위 책에서 제안한) 등의 명칭으로 재고할 필요성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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